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요제프 비르트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[[1879년]] [[바덴]] 지역의 [[프라이부르크]]에서 엔지니어의 아들로 태어난다. 당시 독일 정치인들이 대부분 [[법학]], [[정치학]] 등을 전공했던 것에 비해 비르트는 [[수학]]과 [[자연과학]]을 [[대학교]]에서 전공으로 하였고, 졸업 이후에는 [[독일#s-5.3|김나지움]]에서 수학 선생을 잠깐 하기도 했다. 이후 정치에 투신하여 [[1914년]] [[가톨릭 중앙당|중앙당]] 소속으로 [[라이히스탁|제국 의회]]에 당선됐고, [[1차 대전]] 시기에는 [[적십자]] 소속으로 활동하였다.[* 자원입대 신청을 했지만 신체검사에서 부적합자 판정을 받았다고 한다.] [[공화주의|공화주의자]]였던 비르트는 [[독일 제국]]의 붕괴 이후 수립된 [[바이마르 공화국]]에서도 적극적으로 정치 활동을 이어나간다. [[헤르만 뮐러]]의 1차 내각 당시 재무부 장관으로 입각하였으며, 헤르만 뮐러 내각이 붕괴된 이후 [[콘스탄틴 페렌바흐]] 내각이 성립된 이후에도 자리를 유지한다. [[1921년]] 5월 페렌바흐가 배상금 지불 액수, [[라인란트]] 비무장화를 놓고 [[협상국]]과 충돌을 빚어 사퇴하자 비르트에게 총리직이 넘어오게 된다. 비르트는 비교적 성실하게 배상금을 지불하는 한편으로, [[협상국]]과 배상금을 줄이려는 협상을 시도했지만[* 이러한 '성실한 조약 이행 → 신뢰 형성 → 배상금 감축 협상' 시나리오는 이후로도 [[구스타프 슈트레제만]]에 이르기까지 바이마르 공화국의 지도자들이 계속해서 채택했던 외교 전략이다.] 현실은 녹록치 않았다. 외부적으로는 [[프랑스]]가 강경하게 배상금 감축을 거절했던데다가 내부적으로는 극우세력들이 성실한 조약 이행에 거세게 반발했던 것.[* 극우세력들은 비르트와 내각 구성원들을 매국노라고 비난하면서 공공연하게 암살을 시도했고, 실제로 비르트의 정치적 동지이자 재무부 장관을 지냈던 [[마티아스 에르츠베르거]]가 이러한 극우파의 테러에 희생되기도 한다.]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극우파가 집권한 [[바이에른]]은 공공연하게 중앙정부에게 반기를 들면서 주지사가 [[사병]]들을 조직하고 있는 판국이었고(...) [[1919년]] [[8월 16일]]부터 [[1921년]] [[7월 21일]]까지 상부 [[실레시아|슐레지엔]]에 거주하던 [[폴란드인]]들이 무장봉기를 일으켰다. 무장한 [[독일인]]과 [[폴란드인]] 사이의 충돌이 슐레지엔 곳곳에서 벌어졌고 [[국제연맹]]이 이곳에 개입한다. 상부 슐레지엔의 [[바이마르 공화국|독일]]/[[폴란드 제2공화국|폴란드]] 귀속 여부를 놓고 주민투표가 벌어졌고[* 대략 60% 정도가 [[독일]]로의 존속을 원했고, 40% 정도가 [[폴란드]] 편입을 원했다.] 국제연맹은 상부 슐레지엔의 1/3가량을[* 정확히 말해 68%는 독일에, 32%는 폴란드에.] [[폴란드]]에게 넘겨주는 결정을 내렸고, 이에 비르트는 책임을 지고 사퇴 선언을 한다.[* 특히나 이 지역이 슐레지엔에서 가장 공업화가 이루어진 지역이라서 [[독일]]의 반발이 거셌다. [[협상국]]에게 협조적이던 비르트마저 대놓고 '공업화 지역은 다 뜯어가면서 배상금은 배상금대로 갚으라는 거냐?'라고 거세게 항의할 정도.][* 여담으로 비르트는 개인적으로는 [[폴란드]]를 매우 증오했다고 전해진다. '폴란드를 언젠가는 파괴시켜야 한다.'라는 발언이 기록됐을 정도. 1차대전 이후 독일이 할양한 영토 중 폴란드에 할양된 영토가 가장 많았으므로, 독일인 중에 언젠가 폴란드를 한 번 손 봐줘야 한다는 생각을 안품은 사람이 드물 정도였다.][* 사실 [[폴란드]]는 그 지리적 위치 때문에 [[독일]]과 [[소련]]의 어그로를 자동적으로 끌 수 밖에 없었다. 애초에 [[폴란드 제2공화국]] 자체가 구 [[독일 제국]]과 [[러시아 제국]]의 영토 위에서 성립되었기 때문. 독일은 폴란드와 전쟁을 치룬 것 뿐만 아니라 단지 폴란드가 독일 영토를 가지고 나가떨어진 것 자체 때문에 폴란드를 증오했다. 폴란드는 구 [[오스트리아-헝가리 제국]]의 영토도 가지고 있었지만 이 무렵 [[오스트리아 제1공화국|오스트리아]]는 약소국이 되었기에 폴란드에 원한을 품을래야 품을 수가 없었다.] 하지만 당시 대통령이었던 [[프리드리히 에베르트]]가 그의 사퇴 선언을 반려하면서 비르트는 총리직을 유지하게 된다. 이후 [[1922년]] 4월 비르트는 [[라팔로 조약]]을 맺고 [[소련]]과 국교를 맺어서 [[1차 대전]] 이후 독일의 외교적 고립 상태를 무너뜨리는데 성공하며,[* 다만 이에 [[협상국]]이 발끈해서 전쟁 배상금을 깎아주려다가 파토내버린다.] 공화국 수호법(Gesetz zum Schutz der Republik)을 발의하여 당시 독일에서 공공연하게 자행되는 정치적 테러와 분리독립운동을 막고자 시도한다. 하지만 전쟁배상금 문제는 끝내 비르트의 발목을 잡아서, 배상금 감축 논의가 수포로 돌아간 같은 해 11월에 비르트 내각은 총사퇴한다. 총리직 사퇴 이후로도 비르트는 활발히 정치에 참가하여 [[하인리히 브뤼닝]] 내각의 내무부 장관으로 참여하기도 하고, [[1933년]]에는 [[나치]]가 발의한 [[수권법]]에 반대 연설을 한다. [[수권법]]이 통과된 이후로는 [[나치 독일]]의 탄압을 피해 해외로 [[망명]]하여 주로 [[파리(프랑스)|파리]]와 [[루체른]]에서 지낸다. [[2차 대전]] 종전 이후에 다시 독일로 복귀한 뒤에도 비르트는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했는데, 이 시기 [[서독]] [[독일 총리|총리]]였던 [[콘라트 아데나워]]의 [[할슈타인 원칙]]을 비롯한 반공 친서방 외교노선이 독일의 분단을 영구화할 것이라며 거세게 반대하다가[* 이 사람이 자신의 총리 재임 시기에 [[라팔로 조약]]을 맺었던 것을 생각해보자. [[공산주의]]와 협력이 가능하다고 믿었던 사람이다.][* 심지어 [[동독]]의 집권당인 [[독일 사회주의통일당]]으로부터 연금과 훈장을 수여받기도 했다. 그래서 지금은 기밀해제된 당시 [[미국]] [[미국 중앙 정보국|CIA]]의 문서에서는 이 사람을 동독 첩자라고 의심하고 있었다.] [[1956년]] 고향 [[프라이부르크]]에서 세상을 떠난다. [[분류:독일 제국의 정치인]][[분류:바이마르 공화국 총리]][[분류:독일의 정치인]][[분류:1879년 출생]][[분류:1956년 사망]][[분류:프라이부르크 출신 인물]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